세개의 세상 (진짜세상-종이위의 세상-디지탈 세상)
젊은 엔지니어 시절, 내가 하던 일은 지극히 감각 지향적인 아날로그 방식의 작업이었다. 자동차를 직접 시험 운전하면서 오직 엔지니어의 '엉덩이 감각'으로 노면의 충격을 느끼면서 자동차의 주행 성능을 매끄럽게 만들었고, 엔진의 미세한 소리를 귀로 들으며 센서들을 점검했다. 변속기가 맞물릴 때의 기어 변속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파라미터(Parameter) 값을 수정했다. 종합적으로 자동차를 평가하며, 진짜 고객들이 도로 위에서 좋아할 만한 자동차를 나의 '몸'으로 직접 만들어가던 낭만의 시대였다.
그러나 글로벌 프로젝트 매니저(PM)가 되고 나니, 내가 마주한 상황은 전혀 다른 모양새로 바뀌어 있었다. 엉덩이의 감각 대신 ISO 표준과 VDA(독일자동차산업협회) 규격이 요구하는 수많은 서류를 밤낮으로 작성하고, 그것으로 프로젝트의 생사(生死)를 평가하고 평가받으며 검증과 인증의 챗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 묻혀 살았던 '종이 위의 세상' 파이프라인
매니저의 하루는 온통 약어로 가득 찬 전산 서류들의 연속이었다. 수십가지의 기본 서류중 몇가지의 예를 들면 이렇다.
PMP (Project Management Plan): 모든 공정의 관제탑이 되는 프로젝트 관리 계획서
Milestones Plan & Project Meeting Plan: 선로의 중간 중간 일의 진도를 확인하는 마일스톤과 미팅 계획
Quality Gate 1, 2, 3, 4 Questionnaire: 단계별 품질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한 수백 가지의 질문지 데이터셋
Weekly & Monthly Report / Project Review: 시시각각 위로 보고해야 하는 주간·월간 리포트의 늪
그 수많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숨이 막힐 때쯤, 가끔 후배 엔지니어들이 진짜 자동차를 만지며 기름때를 묻히고 있는 현장으로 내려가면 그렇게 숨통이 트이고 신선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세상에는 두 가지 세상이 존재하구나. 하나는 쇳소리가 나는 '실제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하이 매니저들이 훨씬 더 귀하게 여기는 '종이 위의 세상'이구나."
💻 종이를 삼켜버린 '디지털 세상'의 부상
그런데 은퇴를 하고 인공지능(AI)과 디지털 패러다임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요즘 세상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종이 위의 세상마저 무서운 속도로 지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과거에 '디지털 트윈'으로 불리던 그 서류 더미들이 이제는 클라우드 전산망과 실시간 대시보드 속으로 스며들어 ‘완전한 디지털 세상’이라는 제3의 세상을 창조해 버린 것이다.
종이의 세상은 힘을 잃었고, 이제는 디지털 가상 세상이 절대적인 권력으로 부상했다.
당연하게도 오늘날 기업의 사장님들은 이 디지털 세상을 가장 극진히 아끼고 신뢰하신다. 글로벌 고객들이 실제 전시장으로 걸어 나오는 대신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돈을 결제하고 수조 원의 펀딩을 집행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의 젊은 소비자들은 날것의 진짜 아날로그 세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모니터 스크린과 VR 속 디지털 복사본이 주는 화려함에 온 영혼을 빼앗겨 살아가고 있다.
🏁 세상 참 요상해졌다
몸으로 차를 빚어내던 실제 세상, 관료주의적 규격으로 통제하던 종이 세상, 그리고 숫자가 영혼을 대체해 버린 지금의 디지털 세상까지.
경영자 입장에서는 디지털 트윈을 통해 오차 없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가상 세계가 가장 아름답고 가성비 좋은 순정 시스템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38년간 자동차의 심장을 직접 만져온 노년 엔지니어의 눈에는, 실제 실린더 안의 폭발 충격을 모르는 디지털 픽셀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거대한 흐름이 못내 낯설고 묘하기만 하다.
화려한 디지털 세상이 아무리 세상을 윤택하게 굴려 가더라도, 인간의 육체는 차가운 아날로그의 물리 법칙 위에 살고 있다는 실존적 진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진짜를 잊어버린 가짜들의 질주, 참으로 요상한 세상의 진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