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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사전이고, 영어·일어가 생존줄이던 그 시절 연구소 풍경

 

"라떼"는 빼고, 진짜 '야생' 같았던 그때 그 시절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혹시나 '꼰대'처럼 보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과거의 설을 조금 풀어내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술의 크기가 얼마나 위대한지가 명확히 비교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38년 전, 기아자동차 용인 연수원을 지나 처음 마주했던 1980~1990년대 자동차 연구소의 진짜 '야생' 같은 분위기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지금은 궁금한 기술이 있으면 구글링을 하거나 AI에게 물어보면 몇 초 만에 정답이 쏟아지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해외 논문도 번역기가 완벽하게 실시간으로 통역해 주지요.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의 연구소는 그야말로 '정보의 절대 빈곤 시대'였습니다. 데이터베이스라는 개념도 희박했고, 기술 서적 한 권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신입 엔지니어들은 도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었을까요? 답은 심플했습니다. 바로 '선배들의 입'이었습니다.

선배의 말은 곧 하늘이자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그 시절 연구소에서 수십 년간 기름밥을 먹은 까마득한 선배들은 그 자체로 움직이는 ‘사전’이자 ‘법전’이었습니다. 도면을 그리다 막히거나 설계순서가 꼬일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선배의 머릿속에만 들어있었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배들의 말 한마디는 곧 하늘이었습니다. 기술 한 자락이라도 더 배우려면 선배들을 극진히 모시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낮에는 선배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도면 보는 법, 조립하는 법을 눈동자에 새겨 넣었고, 밤에는 소주잔을 채워드리며 귀동냥으로 기술 노하우를 받아적었습니다.

당시의 도제식 교육은 얼핏 엄격하고 투박해 보였지만, 그것이 정보가 없던 시대에 대한민국 자동차 기술을 전수하고 발전시킨 유일한 아날로그 네트워크였습니다.

1987~1989, 올림픽도 지워버린 격동의 창원과 '구사대' 텐트의 밤

하지만 연구소 안에서 도면과 씨름하는 것보다 더 큰 시련이 연구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입사한 1980년대 말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위 ‘민주화의 바람’이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듯 심하게 불어닥치던 때였습니다. 특히 자동차 부품연구소가 있던 창원은 그 거대한 노사분규의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공장과 정문 앞은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습니다. 머리에 흰 헬멧을 쓰고 청자켓을 입은, 이름만 들어도 삼엄했던 진압부대 ‘백골단’이 연일 정문을 압박했고, 이에 맞서 어떻게든 공장을 가동하고 회사를 지켜내야 한다는 직원들이 팽팽하게 대치했습니다.

해군 중위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혈기 왕성한 신입사원이었던 저는, 자연스럽게 ‘구사대(회사 수호조)’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낮에는 연구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군대 시절의 짬에서 나오는 기량(?)으로 회사 주차장에 텐트를 쳤습니다. 컴컴한 밤, 텐트 안에서 정문을 바라보며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밤새 경계를 서던 그 긴장감은 군대 최전선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1987년, 1988년, 1989년이라는 그 아까운 청춘의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싶습니다. 온 나라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를 외치며 88 서울올림픽의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지만, 창원의 엔지니어들에게 올림픽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당장 눈앞의 일 배우랴, 밤에는 노사분규의 전면에서 구사대 역할로 회사를 지키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나날이었습니다. 축제의 환호성 대신 최루탄 가스와 텐트 속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저는 진짜 '사회'를 배웠고, 엔지니어로서의 책임감을 온몸으로 벼려내고 있었습니다. 그 격동의 물결을 정면으로 맞아내며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뼈대도 함께 단단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멀리 하늘 위에 있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생존을 위한 외공(外功)

1980~9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의 빅3(GM, 포드, 크라이슬러)나 일본의 도요타, 혼다는 우리가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저 멀리 하늘 위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최소한 기술적인 면에서는 접근 불가의 거대한 성벽 같았지요. 그들이 툭 던져주는 기술 문서나 매뉴얼은 마치 신전의 계시록과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 귀한 기술 매뉴얼들이 모조리 영어와 일어로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자동차 기술의 원천 소스를 쥐고 있던 일본의 벽을 넘으려면 일어 독해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습니다. 해군 장교 복무를 마치고 갓 입사한 혈기 왕성한 신입사원에게 들이닥친 첫 번째 장벽은 기계공학이 아니라, 밤새 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어학 전쟁'이었습니다.

선배들이 던져준 까만 복사본 일어 매뉴얼과 영문 데이터 시트를 붙잡고, 자물쇠를 풀 듯 한 글자 한 글자 번역해 나가던 밤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영어와 일어는 단순한 스펙이 아니라, 거대 외산 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엔지니어의 가장 강력한 무기(Weapon)였습니다.

1987년 저자가 Kia Machine Tool에 근무할 때의 사진
창원의 기아기공 (지금은 위아)연구소에서 점심시간동안 한컷


맨땅에 헤딩하던 아날로그 엔지니어들이 만든 기적

지금 돌아보면 참 투박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대신 일단 프로토타입을 깎아서 밤새 굴려보고, 터지면 다시 만들고, 선배한테 혼나면서 눈물 젖은 짜장면을 먹던 그 시절.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기술을 이 악물고 배우며 "우리도 우리 손으로 명차를 만들 수 있다"는 독기와 자부심만큼은 대단했습니다.

영어, 일어 사전을 찢어가며 공부하고, 선배들의 노하우를 악착같이 훔쳐 배우던 그 아날로그 엔지니어들의 땀방울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 자동차가 전 세계 도로를 누비고 소프트웨어로 차량을 제어하는 SDV 시대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꼰대의 옛날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바로 지금의 화려한 자율주행과 전기차 뒤에 숨겨진 대한민국 자동차 연구소의 진짜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칼럼] DCAS의 출현으로 본 자동차 잔혹사와 기술 통합의 방향: SDV 시대, 150년 전 붉은 깃발법이 던지는 메시지

38년간 자동차 제어 시스템의 진화를 현장에서 지켜본 엔지니어의 시각으로 지금의 자동차 제어기술의 발전과 법적 공방을 지켜보면서 적어본 칼럼입니다. 1. 150년 전 붉은 깃발법의 재현, SDV가 맞닥뜨린 진통 SDV(Software Defined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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