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은 다리 하나 차이, 사내 식당은 '언어의 멜팅팟'
쓩쓩쓩 하면 프랑스어, 노·고 하면 스페인어?
유럽에서 자동차 시스템을 개발하며 가장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차를 타고 조금만 달리면 소위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말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도로 표지판의 글자가 완전히 바뀌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되더군요.
세계적인 독일 기업인 보쉬(Bosch) 본사 역시 전 세계에서 모여든 다양한 국적의 엔지니어들로 늘 붐빕니다. 특히 최근에는 유럽인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에서 온 인재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덕분에 점심시간에 사내 식당(Kantine)에 가면 사방에서 각양각색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완벽한 다문화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영어와 독일어뿐이기에, 식당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른 나라 말들은 억양이나 리듬으로 어느 나라 말인지 짐작하곤 합니다. 오랜 세월 귀동냥을 하며 터득한 저만의 언어 추측 노하우가 있는데, 자칭 '90% 이상의 적중률'을 자랑합니다.
프랑스어: 전체적으로 “쓩쓩,,쓩..” 하는 소리로 들리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리듬이 있고 노래처럼 들리면 100%입니다.
스페인어 & 이탈리아어: 전체적으로 아주 빠르다는 느낌을 주는데, 말끝의 모음이 “…노, …고”처럼 주로 '오(O)'로 끝나면 이 계통입니다.
네덜란드어 & 스웨덴어: 분명히 내가 아는 독일어처럼 들리는데, 가끔씩 단어 한두 개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단어로 대체되어 있으면 십중팔구 이쪽입니다.
러시아어 & 폴란드어: 아예 못 알아듣겠고, 발음이 목구멍 저 아래 깊은 곳에서 긁어내듯 웅장하게 내는 소리가 많이 들릴 때는 슬라브 계통입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사내 식당 앉아서 세계 언어 지도를 귀로 읽는 듯한 재미가 쏠쏠합니다.
"공식 언어는 영어"라는 달콤한 거짓말
회사가 글로벌화되면서 공식 지정 언어는 단연 '영어(English)'가 되었습니다. 사내 외국인 비율이 독일인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으니 당연한 조치였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게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공식 언어"는 어디까지나 문서상의 규칙일 뿐, 편한 것을 찾으려는 사람의 심리는 글로벌 엔지니어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더군요.
당장 최신 기술을 반영한 따끈따끈한 원천 자료나 도면은 예외 없이 독일어로 가장 먼저 작성됩니다. 영어판이 나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고, 어떤 귀한 자료들은 단물이 다 빠진 후에야 나오거나 영영 영어 번역본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회의석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로 젠틀하게 회의를 시작하더라도, 정말 핵심이 되는 예민한 기술 논쟁이나 최종 의사결정의 순간에 이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독일어가 터져 나옵니다.
결국 글로벌 무대의 한복판에서 겉돌지 않고 '핵심'으로 걸어 들어가려면, 공식 언어인 영어 너머에 있는 그 나라의 모국어를 깊이 있게 익혀야만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젊은 날 연구소에서 사전을 찢어가며 일어와 영어를 공부했던 독기가, 독일 땅에서 다시 한번 발동되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