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지방분권, 도메인 아키텍처의 명암과 단일 칩(SoC)으로의 회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많아지면 중앙정부 하나의 조직만으로는 효율적인 관리와 서비스 지원이 어려워져서 지방분권을 시도합니다. 기묘하게도 똑같은 현상이 현대적 자동차 내부의 전자제어 서킷에서도 그대로 발생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ECU의 개수가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나다 보니, 이제는 어느 하나를 대장(Master)으로 임명해 수십, 수백 개의 하부 유닛들을 제어하고 통신 노이즈를 조정하기에는 완전히 불가능한 단계에 도달해 버린 것입니다.
이 장벽을 넘기 위해 자동차 엔지니어들이 인간 사회에서 힌트를 얻어 찾아낸 해결책이 바로 자동차의 지방분권, '도메인 아키텍처(Domain Architecture)' 설계입니다.
1. 도메인 아키텍처: 권역별 독립 제어와 게이트웨이 체제
도메인 아키텍처의 핵심 메커니즘은 자동차를 기능과 성격에 따라 몇 개의 독립된 권역(Domain)으로 묶어 배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어의 부하를 분산시키는 배선 아키텍처가 강력한 이유는, 각 권역이 담당하는 데이터의 성격과 물리적 임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도메인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율주행(AD/ADAS) 도메인 ➡️ '통신과 대용량'이 최우선: 카메라의 고해상도 영상 데이타, 라이다(LiDAR)와 레이더의 수많은 점군(Point Cloud)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해야 하므로 다른 어떤 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대용량 트래픽을 다룹니다. 따라서 이 권역 내에서는 초고속 차량용 이더넷(Ethernet) 같은 대량 통신 기능이 가장 중요합니다.
- 파워트레인(Powertrain), 샤시 도메인 ➡️ '검증과 안전'이 최우선: 다루는 데이타는 고작 비트(Bit) 단위이며 속도 역시 빨라야 1/1000초(밀리초)에 한 번씩 계측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 데이타 송수신을 단 하나라도 놓치면 운전자의 생명과 직결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도메인에서는 통신 속도보다는 데이타 송수신의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인포테인먼트(IVI) 도메인 ➡️ 'UI와 HMI'가 최우선: 최신 소비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영역입니다. 이 도메인에서는 데이타의 안정성이나 초고속 통신보다는 HMI(Human-Machine Interface; 인간-기계 인터페이스)와 같은 감성 품질이 절대적입니다. 화면 렌더링이 부드러워야 하고, 스피커 음질이 감미로워야 하며, 내비게이션 UI가 직관적이어야 유저들의 긍정적인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바디(Body) 도메인 ➡️ 'Comfort'가 최우선: 아마도 가장 편안하게 일을 하는 도메인으로 생각됩니다. 실내의 공조장치 제어, 시트 조정 등과 같은 다른 도메인에 비해서 비교적 업무 밀도가 낮은 일이 부과되어 있습니다.
2. 거장의 직관: 단촐하고 간단한 아키텍처로의 회귀
현재 수많은 완성차 제조사들은 이 복잡한 도메인 분권 체제를 넘어, 차량을 물리적 구역으로 묶는 조날 아키텍처(Zonal Architecture)로 진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현장에서 시스템을 다룬 저의 사견으로는,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자동차 아키텍처는 과거의 단촐하고 단정한 원-칩(One-Chip) 구조로 회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향후에는 하나의 강력한 초고성능 ECU(SoC; 시스템 온 칩)가 도메인 전체의 연산을 통째로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잡한 구리선 하네스를 타고 흐르던 도메인 내 물리 통신들이 전부 단 하나의 실리콘 칩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칩 내 통신(On-Chip Communication)'으로 대체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과거의 직관적이고 단촐한 아키텍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분산 제어를 위한 설계 시간, 로직 검증 시간 확보가 가능하며, 무엇보다 매일 밤 데이터 노이즈와 사투를 벌이는 자동차제어 시스템 개발 엔지니어들의 정신적 부담과 과부하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거대한 연산 부담이 시스템 엔지니어에게서 마이크로프로세서(MCU)를 설계하는 반도체 엔지니어의 뇌로 고스란히 이관되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