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페이지짜리 설명서와 엔지니어의 비명: 기계가 전자가 되던 잔혹사 (The Rise of ECU)
자동차가 전자제품이 되던 날, 악몽은 시작되었다
자동차가 단순한 '기계장치'에서 스마트한 '전자장치'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시발점은 다름 아닌 ECU(Engine Control Unit)의 출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에 이 ECU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였습니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더 똑똑해지고 정밀해진다며 다들 환호했을지 모르지만, 최전선에 서 있던 우리 자동차 시스템 엔지니어들에게는 그것이 거대한 '악몽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반도체 메모리의 용량 증가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습니다. 황의 법칙이나 무어의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도체가 고도화되자, ECU 하드웨어의 세대교체(Generation Upgrade) 주기도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습니다. 하드웨어가 받쳐주니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크기와 기능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습니다.
500페이지의 낭만에서 만 페이지의 지옥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위 데이터프레임(Dataframe)이라 부르던 ECU 소프트웨어 기능 설명서는 약 500페이지 내외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엔지니어가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책 한 권을 머릿속에 통째로 암기하고 완벽하게 숙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내가 제어하는 시스템의 처음과 끝을 완벽히 손에 쥐고 있다는 아날로그적인 자부심과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나 2000년대로 국경이 넘어가면서 상황은 완전히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페이지던 설명서가 순식간에 수천 페이지로 불어나더니, 조금 고급 사양의 하이엔드 ECU로 가면 드디어 '만(10,000) 페이지'가 넘어가는 기괴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물리적인 두뇌 용량으로는 도저히 한 명의 엔지니어가 담당할 수도, 전부 이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진 것입니다. 시스템 전체를 조망하던 엔지니어들은 결국 잘게 쪼개진 소프트웨어 기능의 한 파트씩만 간신히 붙잡고 늘어지는 파편화된 부품이 되어야 했습니다.
대학교 공학 공부는 쓸모가 없었다: 눈부신 발전의 그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스템 엔지니어들은 매년 업그레이드되어 쏟아지는 기술적 플랫폼과 파라메터들을 따라잡기 위해 매일 밤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정글이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교에서 배운 낡은 공학 지식은 현업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기계의 메커니즘을 배우고 나왔더니, 현장에서는 눈부시게 발전한 전자공학과 소프트웨어 제어 로직이 자동차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화려하고 눈부신 전자공학의 발전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최일선의 자동차 시스템 엔지니어들은 말 그대로 제대로 '경을 쳤던' 셈입니다.
오늘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이토록 조용하고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반도체의 기적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만 페이지짜리 설명서에 깔려 매년 밤을 지새웠던 초기 시스템 엔지니어들의 독기와 눈물이 화석처럼 박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